Special artist

박선기(Bahk Seonghi)의 조각은 공존할 수 없는 역설적인 요소의 병렬적 집합체다. 중력을 거부하면서 그것의 지배를 받고, 형태의 파편화를 지향하면서 굳건한 형태를 구축한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그의 작업은 조각의 카테고리에 속하면서 회화적 일루전의 형성을 꾀한다. 김종영미술관의 ‘2005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기도 했던 그의 전시가 2008년 12월 15일부터 2월 1일까지 김종영미술관에서 열렸다. 박선기가 추구하는 조각적 일루전의 체계에 대해 살펴본다.

 

회화적 조각, 시점의 교란과 재구축

최태만_국민대 교수

박선기는 2003년 인사아트센터에서 가진 개인전을 통해 국내에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낚싯줄로 작은 숯 덩어리를 엮어 공간에 매달아 건축적 구조를 재현한 작품으로 주목받는 그는 김종영미술관의 ‘2005오늘의 작가’로 선정돼 대규모 개인전을 가짐으로써 다시금 주요작가로 부상했다. 이 전시로 제9회 김종영조각상을 받기도 한 그는 중앙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했고 1994년 학부를 졸업한 후 이탈리아로 유학, 2002년 밀라노의 브레라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하였다.

2003년 귀국하기 전 그는 이미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주목받는 조각가로 성장해 있었다. 브레라미술학교에 재학 중일 때도 나폴리, 로마, 밀라노, 베를린 등지에서 개인전을 가진 바 있는 박선기는 2001년에 베니스의 아레스날레에서 개최된 ‘인간의 부재(No Human)’란 주제의 전시에 숯과 낚싯줄을 이용하여 높이가 7미터에 이르는 건축구조물을 설치하였다. <현존-판테온>이란 제목의 이 작품은 유서깉은 아레스날레의 건축공간 내부를 재현한 것이었다. 기둥과 부속구조물을 실물과 같은 규격으로 설치한 이 작품은 실재와 가상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그러나 공간에 매달린 이 가상의 기둥은 수많은 숯덩이에 의해 구성된 것이었기 때문에 견고하다기보다는 허약하고 유동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숯을 재료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이것은 ‘작품의 항구적 보존’이란 전통적 관념을 위반한다.

숯덩이를 낚싯줄로 매달아 실물과 같은 형태를 재현해야 하기 때문에 그의 작업은 공간과 형태, 구조에 대한 치밀한 계산과 능숙한 설치 경험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전시폐막과 동시에 철수할 경우 형태는 사라지고 원재료만 남게 되므로 다른 설치처럼 그의 작품은 일회적인 특징을 지닌다. 그러나 이 작품은 건축물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되돌아보게 만들 뿐만 아니라 그 공간을 새롭게 해석하도록 유도한다는 점에서 ‘장소특정성’이 두드러진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2003년 이스라엘에서 열린 ‘하이파 국제트리엔날레’에서도 높이가 4미터에 이르는 기둥을 설치하였다. 아레스날레 전시에 출품한 작품과 비교할 때 이 트리엔날레에서는 기둥과 마주한 벽에 나무를 실루엣으로 표현한 드로잉이 부가되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두 작품은 다같이 일회적이고 장소특정적인 설치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투명하고 가는 줄로 숯을 매달아 건축구조물이나 공간에 매달린 원을 만드는 이러한 <현존-집합체>연작이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이유에 대해 규명할 필요가 있다. 먼저 재료의 맥락에서 그가 사용하는 숯은 연약하여 부서지기 쉬운 물질이다. 게다가 그는 숯덩이를 작은 크기로 조각낼 때 형성되는 비정형의 형태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흙, 나무, 돌, 청동과 같은 전통적인 재료에 익숙한 우리에게 이 물질은 보이스(Joseph Beuys)의 기름덩어리처럼 언제든지 녹아내릴 수 있는 무상한 것으로 비칠 수 있다. 아르테 포베라의 쿠넬리스(Jannis Kounellis)는 석탄을 이용해 금방 사라져버릴 꽃을 만든 바 있는데 이들의 작품은 ‘고귀한 예술’에 대한 부르주아적 관념을 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위적인 특징을 지닌 것이었다. 박선기의 숯 역시 예술작품은 고급스럽고 거의 항구적인 물질 속에 예술가의 혼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엄숙주의를 거부하고 있으나 그가 만든 형태가 건축구조를 재현한 것이란 점에서 앞의 두 예술가의 작품들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박선기의 설치작업에서는 일차적으로 숯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형태가 중요하다. 그가 설치한 건축구조물은 공간에 대한 인식과 경험의 틀을 바꿔놓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이 구조물은 중력의 법칙에서 벗어나 있다. 즉 공중에 매달린 숯에 의해 형성된 형태는 지면 위에 굳건하게 놓여있다기보다 투명하고 가는 줄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게다가 숯을 조밀하게 매달았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체적과 중량을 지닌 가설물에 불과하다. 이런 점은 그가 건축한 기둥이 실재의 흉내 내기이자 공간의 가공임을 증명하는 요소이다. 마치 부서진 건축의 잔재를 재조립해놓은 형국이라고 할까. 그래서 그의 작업은 공간의 복원이란 상상을 자극한다. 특히 성긴 구조의 높은 투과성은 이 구조물에 의해 공간이 차단되는 거이 아니라 주변공간과 작품이 서로 조응하도록 유도한다. 그래서 장소에서 작품은 유령처럼 드러나기도 하고, 주변공간에 흡수되었다 돌출하는 독특한 경험을 제공한다.

다음 단계로 본래 있었지만 철거되었던 구조의 복원 혹은 원래 없었지만 상상에 의해 복원된 것과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형태를 구성하고 있는숯은 무슨 구실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인간이 숯을 연료로 사용한 역사는 오래다. 특히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된 화석물질의 발견에 대해 떠올릴 때 숯을 문명의 상징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런 점은 그가 특별히 건축구조물을 재현한 이유를 해명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아니면 문명의 흥망성쇠에서 불이 차지하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매달린 기둥을 화재와도 같은 재난에 의해 불타버린 문명의 흔적을 복원해놓은 기념물로 받아들여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숯은 특히 우리 나라에서 연료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출산한 집 대문 앞에 숯을 내거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사악한 것의 침입을 방지하는 척사(斥邪)기능을 갖고 있고 간장과 같은 발효식품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항아리에 숯을 띄우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방부 기능까지 담당한다. 그런 점을 주목해 볼 때 박선기의 숯으로 조립해놓은 구조물은 복원이란 의미는 물론 시간의 부패를 저지하는 방부의 의미까지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다.

김종영미술관의 ‘2005 올해의 작가’로 선정된 박선기는 기왕에 제작하던 경향의 작품과 함께 새로운 프로젝트 작업을 발표했다. 그가 발표한 프로젝트 작업은 미술관의 중정(中庭)에 해당하는 목제 데크에 설치한 거대한 규모의 식탁과 의자, 천장에 매달아놓은 파괴된 계단, 그리고 실물보다 엄청난 규모로 확대된 필름인데 모두 실재와는 다른 형캐와 규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공간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제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자신이 추구해오던 방법의 확장이자 새로운 모험이었을 이 작업 중에서 큰 규모로 확대된 필름을 보면 원래 형태를 비스듬하게 왜곡하였을 뿐만 아니라 프레임 속에 이차원적 평면으로 기록된 영상을 입체로 구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필름통을 마치 프레스에 넣어 압축한 듯 타원형으로 만들고 여기에 경사진 각도를 부여함으로써 관람자가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뒤틀리게 보이도록 조작하고 있다. 필름의 얇은 막 역시 확대된 규격에 따라 일정한 두께를 지닌 것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 작품은 두가지 측면에서 사물의 실재성을 위반하려는 의지를 드러낸다. 먼저 원통이 삼차원으로부터 이차원으로 환원하려는 왜곡의 과정을 보여준다면 그 반대로 이차원의 평면인 필름은 점차 삼차원으로 바뀌고 있다. 한 작품에서 두 공간이 서로 다른 지향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사물의 실재성이 박탈되는 그 경계선에서 시선의 유희는 점증하여 마침내 이것은 ‘필름이 아니다’라는 경지로 발전한다. 그런데 그것을 필름인 것처럼 우리의 눈이 반응하고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훈련된 눈’이 유사성의 법칙에 너무도 익숙하게 적응한 결과다. 이것이 우리가 박선기의 작품에서 놓치기 쉬운 부분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지금 보고 있는 사물을 실재라고 믿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실재도, 허상도 아닌 바로 작가에 의해 기획된 또 다른 사물의 영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이 혼란을 겪는다면 그것은 이 영상을 실재로 받아들여야 하는 우리의 관습에 맞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건축구조물을 재현하면서 보여주었던, 파괴된 혹은 무너져내리는 계단에 이르게 되면 이 모조된 실재는 마침내 조작된 허구임을 드러낸다. 박선기의 파괴된 혹은 재조립된 계단을 레이첼 화이트리드(Rachel Whiteread)의 장소특정적 작품과 연관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나에게 그것은 형식적 유사성을 준거로 한 부질없는 비료로 비친다. 레이첼은 특정 공간을 떠내는(casting) 작업을 보여주지만 박선기의 작품은 공간 속에 개입하여 공간을 새롭게 해석하고 활성화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 작품의 출발점이 숯으로 건축적 구조를 만들어낸 작품의 연장에 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에게 계단은 가운데가 붕괴된 채 매달려 있는 구조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것을 계단이면서 계단이 아닌 설치물이며 나아가 계단으로 위장된 구조물이자 대상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교란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가짜 실재’인 것이다. 그는 편안한 상태에서 대상을 지각하려는 우리의 관습적 시선을 혼란시킴으로써 사물의 실재성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을 반성하도록 만든다.

그것은 평면거울에 투영된 안정되고, 따라서 시점의 비틂을 통해 왜곡된 영상을 평면이 아닌 입체로 다시금 조작한 눈속임(trompe-loeil)의 세계이자 환영주의로 미끄러진 완벽한 허구인 것이다. 박선기의 왜곡된 시점은 사물이 시점에 따라 얼마든지 실재로부터 멀어질 수 있고, 실재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대한 반역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유사성을 실재와 동일시하는 ‘관습화된 눈’에 대한 저항임에 분명하다.

 

실재와 환영이 맞닿는 시점, 그 경계에서의 유희

시점을 비튼 박선기의 작업에서 발견되는 착시효과는 정물에 이르러 더욱 고양된다. 디지털미디어가 지배하는 오늘날, 시점은 이제 더 이상 진실과 맞닿은 문제가 아니다. 컴퓨터는 우리의 생물학적 눈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지점까지 파고들고,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가짜(simulacra)가 실재를 대체하고 있음을 목격하기란 어렵지 않다. 컴퓨터그래픽, 가상현실이 만들어내는 세계에 익숙한 우리에게 전통적인 제작방법에 의존한 박선기의 ‘시점놀이’는 따라서 전통적인 조각의 소극적 변형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 것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 그러나 숯을 매다는 방법으로 건축적 공간을 구성했던 이 작가가 관심의 대상을 정물로 옮겨가면서 시점의 문제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제시했을 때 그 속에 비상한 위트가 깃들여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책 위에 놓인 카메라나 찻잔, 테이블 위의 과일 등을 재현한 정물에 대해 평범한 일상의 소재를 재구성한 것으로 보아 무방하다. 말하자면 치밀한 계산과 정교한 기술을 바탕으로 한 그의 정물은 공간에 놓인 사물을 새롭게 볼 것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박선기는 최근 나무를 이용해 이젤을 재현했다. 실물의 형태를 모사한 이 이젤은 기능과 상관없는 하나의 물체이다. 나무를 고정하고 지탱하는 금속 부속물들조차 모두 나무로 재현해 놓았기 때문에 ‘모조된 오브제’로서의 이젤이란 특징이 돌출하는 대신 실제 화실에 놓여있을 ‘실물’로서의 이젤이란 특징은 후퇴한다. 그 위에 캔버스의 프레임이 놓여있다. 그러나 이 캔버스는 텅 비어있다. 텅 비어 있다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이 프레임 속에는 동일한 형태의 이젤과 캔버스의 프레임이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큰 프레임 속에 재현된 프레임 속에서 동일한 형태의 이젤과 프레임은 다시 한번 반복 된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 비어있는 공간은 빈 것이 아니라 자기복제적인 사물에 의해 채워져 있다. 그런데 프레임 속의 동일 사물이 서로 반대방향으로 비켜나간 시점에 의해 재현되고 있으므로 이 또한 엄밀한 의미에서 자기복제라고 볼 수 없다. 마치 거울처럼 자기모습을 투영하되 내부의 형태가 점짐적으로 축소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시점을 뒤틀어 내부를 향해 기울어진 형태가 공간의 깊이를 지각하도록 유도하고 있으나 옆에서 보면 거의 평면에 가까운 정도의 일정한 두께를 지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가 만든 이젤은 실재와 눈속임에 의해 만들어진 공간을 공유하고 있다. 시점의 왜곡이란 방법을 활요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입체이면서 동시에 평면의 특징을 지닉 있는 것이다. 이런 시점의 유희는 액자를 활용한 작품에서도 반복된다.이 작품은 빈 액자 속에 또 다른 빈 액자가 서로 맞물린 형태로 구성된 것이다. 공허한 구멍 속으로 파고드는 또 다른 구멍을 중첩시킨 구조의 마지막 사각틀도 비어있다. 비어있는 내용 자체가 내용을 구성하는 형국이라고 할까. 따라서 박선기의 빈 액자는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액자로 채워져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액자의 크기는 일정한 논리적 규칙에 따라 점진적으로 축소되고 있으나 앞의 이젤과는 달리 액자들이 비스듬한 각도로 외부공간을 향해 튀어나와 있기 때문에 입체감이 두드러지는 차이가 있다. 이 작은 차이를 제외하면 이젤과 액자는 동일한 주제와 방법에 의해 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작품은 그가 이미 2005년에 발표했던 재현된 필름통의 연장에 있으면서도 그것에 평면성을 부여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그의 정물들은 형태를 드러내기 위해 대부분 흰색인 경우가 많다. 물론 앞의 이젤이나 액자처럼 원재료인 나무의 재질을 살린 경우도 있으나 대체로 표면을 매끈하게 다듬고 흰색도료로 마감하기 때문에 그 창백하고 투명한 표면을 통해 그것이 조작된 대상임을 지각하기란 어렵지 않다. 최근의 정물작업에서 차곡차곡 쌓아놓은 여행용 트렁크와 우산, 중절모를 배한 것은 왜곡된 시점으로 제작했다는 사실 못지않게 이 사물들의 익숙하면서 낯선 조합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을 초현실주의의 데페이즈망으로 연결시킬 수는 없지만 이 조합이 여행에 대한 문학적 상상을 자극한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 가방 시리즈가 모두 검게 채색돼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상상의 여행을 가로막는다. 특히 나무의 거친 질감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업들은 숯의 검은색과 조응하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이러한 문학적 상상으로의 여행을 저지하고 사물로서 바라볼 것을 요구하기 위한 장치임을 드러낸다.

미술사적 맥락에서 ‘시점(point of view)’에 대한 탐구는 예술가들의 목표인 진실의 추구를 위해 고안된 ‘보는 눈’의 개발이란 특징을 지닌다. 원근법과 착시를 잘 활용한 홀바인(Hans Holbein)의 <대사들>에 등장하는 두 주인공의 초상화 아랫부분에 그려진 두개골의 ‘왜곡된(anamorphose)형상’은 현세의 권력이나 명예의 무상함에 대한 경고, 즉 메멘토모리(memento-mori)로 볼 수 있는데 라캉(Jacques Lacan)은 그것에 대해 평면과학이 관심의 대상이던 르네상스 시대 주체의 소멸을 분명하게 제시한다는 혁신적인 해석을 시도한 바 있다. 르네상스의 원근법은 가시세계의 대상을 이차원적 평면 위에 논리적으로 재현하는 과학적 방법임에 분명하지만 그것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 기초한 것으로서 ‘시선의 독재’를 시각적으로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박선기가 벌이고 있는 시점의 유희는 르네상스적 투시원근법으로부터 벗어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욱 집요하게 파고들어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박선기의 ‘트릭’이 ‘시각의 놀이(optic game)’을 지향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이성적으로 계산된 결과라는 점에서 실재의 교란인 동시에 그것의 재구축이란 특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박선기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시점의 왜곡, 혹은 그가 말하는 시점 놀이는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유사한 방법으로 두개골을 재현한 작가로 로버트 라자리니(Robert Lazzarini)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라자리니가 컴퓨터 스캐닝, 래피드 프로토타이핑(Lapid prototyping)과 같은 디지털 특수효과와 기술을 동원하여 컴퓨터상에서 왜곡된 물체를 다시 물리적인 형태로 구현하는 방법을 사용한다면 박선기는 시점에 따라 대상이 보이는 결과를 드로잉을 통해 시각화한 후 그것을 합판이나 석고와 같은 재료를 가공하여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드러난 결과는 유사하다고 할지라도 그 출발점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박선기는 물질과의 직접적인 접촉과 가공을 통해 일상적 정물들을 시적(詩的)으로 압축된 대상으로 바꿔놓고 있는 것이다. 이 물체를 만드는 과정은 거의 장인적 몰입과 수도자의 엄격한 수행에 필적하는 노동의 수고를 필요로 한다. 결과적으로 그가 만들어낸 사물들은 결코 실재가 아니면서 실재에 대한 우리의 선입관을 전복시키고 우리의 시점을 뒤흔든다. 세잔의 정물화에서 느낄 수 있는 시선의 여린 흔들림, 작품 자체는 매우 견고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이 정박하지 못하고 심리적 주기운동을 일으키케 만드는 그 특이성을 박선기 작품이 지닌 장점이자 매력으로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박선기의 시점놀이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은 입체이면서 회화적 특징을 공유하는 ‘회화적 조각’으로 볼 수 있다.

 

 

Interview

“작은 것이 모여 하나의 견고한 형태를 이룬다.”

처음부터 작품에 대해 질문하면 분위기가 너무 딱딱해질 것 같다. 우선 요즘 근황에 대해 알려달라. 현재 김종영미술관에서 개인전이 열리고 있고 2월에 밀라노 트리엔날레에 참가 예정이다. 또 3월에는 두바이아트페어와 뉴욕 scope아트페어에 참가할 예정이다.

김종영미술관에서 선정하는 ‘올해의 작가’타이틀이 박선기라는 작가에게 미치는 영향은 어떠한가? 평소 존경하던 김종영 선생님의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게 되어 기뻤고 김종영조각상까지 받게 된 2006년은 참으로 기쁜 한해였다. 김종영미술관은 그간 수준 높은 전시를 이어가고 있었기에 모든 작가가 전시를 해보고 싶어하는 공간이다. 그런 곳에서의 전시는 타인의 부러움과 함께 나 스스로도 자신감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된다.

생활패턴은 어떠한가? 간단하게 자신의 하루에 대해 소개한다면? 아침 8시쯤 일어나서 9시부터 일을 시작한다. 11시에 이른 점심을 먹고 4시에 간식을 먹는다. 그리고 7시까지 일하고 저녁. 때때로 친구나 다른 작가들과 술자리를 갖기도 한다. 하지만 일이 바쁘면 전면 달라지는게 흠.

작품을 보면 두 가지 역설이 한꺼번에 존재한다. 형체의 분할, 분리와 동시에 그것이 모여 하나의 형태를 견고히 구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쇠라 등의 점묘기법을 연상하게 하기도 한다. 그래서 기자의 눈에는 박선기의 작품은 회화성이 매우 강조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코멘트한다면? 그리고 언제부터 이러한 작업을 하게 되었는지? 숯을 매단 지는 14년쯤 되었지만 대학 때 돌을 매달기도 했기 때문에 작업은 꽤나 오래됐다고 할 수 있다. <조합체(aggregate)>라는 작품의 제목에서도 보여지듯이 작은 것들이 모여 하나의 견고한 형태를 이룬다. 여기서 다시 분할하거나 파손시켜 시적인 분위기로 만들기도 하고 다시금 형태나 개념에 대한 재(再)사고의 여지를 남긴다. 작품에 나타나는 그림자 효과가 더욱 동양적인 회화 느낌을 들게 한다.

위의 질문에 연속하여 그러한 경향을 보이게 된 특별한 개인적 경험이나 원인이 있었는가? 워낙 깊은 산골에서 태어났고 자연 중에서도 나무를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숯이 나온 것 같다. 그리고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그림을 그리다 보니 회화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위 질문에서 분할과 그것의 합체는 ‘실’이라는 매개체로 완성된다. 그런데 ‘실’이라는 소재는 여성작가가 전통적으로 여성의 억압된 삶을 표현할 때 주로 쓰인다. 남성 박선기에게 ‘실’이라는 소재가 갖는 의미라면? 일반적으로 실이라기보다 남자들이 낚시할 때 주로 쓰는 남성용 줄이라 할 수 있다. 이 투명한 나일론줄이 수많은 숯 덩어리의 텁텁함을 없애주는 구실을 한다. 예민한 감성의 부분을 자극함으로써 숯 덩어리와 함께 조화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중앙대를 거쳐 이탈리아에서 수학하여 오랜 기간 그곳에 머무르는 것으로 안다. 특별히 이탈리아를 수학의 장소로 선택한 이유가 있는가? 또한 그곳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작업했는지 알려달라. 대학을 졸업한 뒤 심문섭 선생의 조언을 받아 밀라노 유학을 선택하게 되었다. 밀라노 국립미술원을 다니면서 이탈리아 조각의 전통성과 함께 밀라노의 현대적인 감각을 배웠다. 처음 2년은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그냥 작업만 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밀라노의 갤러리 Lawrence Rubin 과 전속 계약을 맺고 9년 동안 작업했는데 이때 좋은 작업이 많이 나온 듯하다.

 한국에서 활동이 이탈리아에서 활동할 때와 어떠한 차이점을 갖는다고 보는가? 이탈리아는 화랑들이나 기획자들이 굉장히 긴 시간을 두고 일을 진행하는 데 반해 우리나라는 모든 게 급하게 진행되는 것 같다. 여유가 부족해 보인다.

경상북도 선산이라는 다소 외진 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유년의 기억이 지금 당신에게는 어떤한 의미로 다가오는가? 굉장히 평화롭고 조용한 풍경들이 머릿속에 남아있다. 들판으로 산으로 뛰어다니면서 자유롭게 지내던 기억이 난다. 그때 본 자연에 대한 기억들이 마음속에 많이 남아 있는데 이런 기억들과 감성이 작업에서 묻어나는 것 같다.

와이어를 이용한 작업 외에 개념적 성격이 짙은 작업이나 환영이 강한 옵티컬한 작품도 함께 선보이고 있다. 그런데 와이어에 매달린 작품이 환영성에 대한 본질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었다면 나머지 작품은 그에 대한 답과도 같다는 생각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처음에는 너무나도 달라 보이는 두가지 성향의 작품들이지만 사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두 가지 작품에서 묻어나오는 느낌이나 감성이 같다고들 한다. 내가 보기에도 둘은 같은 감성을 가지고 있다.

잠깐 보고 판단할 내용은 아니지만, 매우 낙천적인 성격인 것 같다. 자신의 성격에 대해 말하자면? 낙천적이지만 작업에는 사실 무척 꼼꼼한 성격이다. 잘 삐지고 투정도 자주 부리고, 짜증도 내고.(웃음)

도록을 통해 보여지듯, 박선기 작가의 작품은 상업적인 면과 접점을 이룰 여지가 많다고 본다. 또한 그런 측면에서 좋은 반응을 얻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기도 하고. 모든 작가의 화두가 그렇지만 작품활동에 대한 작가적 고민과 생활을 위한 작품판매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유지해야 한다고 보는가? 나의 작품들은 상업성이 강하다. 보통의 작가들이 처음에 실험적인 작품으로 시작해서 안정적인 작업으로 진행한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유학하면서 남과 구분되지 않는 작업들이 싫었고 생계도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다른 일은 더더욱 하기 싫고 그래서 작품의 성향이 이렇게 온 것 같다. 요즘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생각하는 작업 쪽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 같다. 작업에 깊이감을 주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작품 구상부터 제작, 설치에 따른 노고가 상당할 듯하다. 스트레스를 풀 색다른 취미가 있는가? 이전에 이야기했듯 싹 잊고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는 듯한데? 작업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는 시간에 쫒기는 것인데 그럴 땐 괴롭다. 가끔 혼자 차 몰고 여유롭게 다닐 때가 가장 좋은 것 같다. 마음껏 볼륨 높여 음악도 들으면서.

이후 계획(작품설치 계획도 함께)과 덧붙여 할 말이 있다면? 혼자 열심히 그리고 없는 듯이 작업만 하고 싶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약속이 너무 많다.

 

박선기는 1966년 경북 선산에서 태어났다. 중앙대 조소과와 밀라노의 the Accademia di Belle Arti Brera 조소과를 졸업했다. 1994년 서호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을 시작으로 이탈리아, 독일, 포르투갈, 중국 등지에서 수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국내외 다수의 그룹전과 초대전에 참가했으며 스페인, 이탈리아 등지의 기업, 기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현재 장흥과 남양주를 오가며 작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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