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ulpture floating in the
air, by Bahk Seon Ghi
THE SHILLA’s lobby welcomes
visitors with elegant gestures. Acryl sculpture pieces glitter in the air, as
they float around in the space.
Sculptor Bahk Seon Ghi is the
magician behind this sculpture, titled “An Aggregate 09-0714”.
2차원의 회화는 평면의 캔버스에서 실존하는 사물을 묘사할 때 3차원의 입체로 표현하기 위해 애를 쓴다. 3차원의 조각은 현실을 그대로 구현하는 대신 개념을 담거나 변형하고, 형태나 재료를 탐구하거나, 비현실적인 질료를 결합한다. 그리고 더욱 확장된 3차원, 즉 공간을 의식하고 고려한다. 한국과 이탈리아에서 조각을 전공하고, 국내외를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박선기 작가의 작품은 여기에 질문을 던진다. 평면과 입체를 규정하는, 가장 사실적으로 생각해온 감각인 시각에 대해. 그리고 공간에 새로운 구조물을 건축하는 조각과 설치 작업에 대해.
시공간의 재창조, 시점의 교란
얼핏 심오해 보일 수도 있는 물음이지만 또 의외로 간명하다. 이를 시각화한 그의 작품이 그렇다. 캔버스 속 정물화가 묘사하고 있을 법한 테이블과 그 위에 책, 과일이 조각 작품으로 전시되어 있다. 언뜻 보기엔 평범한 ‘Point of View’ 시리즈. 그러나 시선을 조금씩 움직이면 이 작품이 사실은 완벽한 입체가 아니라 평면에 가깝게 납작한 모양을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작품 앞에서 깨닫는 것은 평면 회화에서 표현한 공간감이 거꾸로 입체에서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각에는 시점을 넣을 필요가 없잖아요. 작품 자체에 이미 시점이 표현되어 있으니까요. ‘Point of View’ 시리즈는 거꾸로 조각에 시점을 부여한 것이죠.” 시점의 교란이다.
박선기 작가의 작업 중 가장 오랜 탐구를 거친 것을 ‘An aggregate’ 시리즈다. 작은 숯 조각을 나일론 줄에 매달아 허공에 띄우는 거대한 설치 작업. 수없이 많은 숯 조각은 나일론 줄의 위치와 배열에 따라 작가가 의도한 형태를 이룬다. 약 17년째 이어지는 이 시리즈의 시작은 ‘나무’에서 출발했다. “자연을 좋아해 이를 작업에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바람, 산, 나무를 특히 좋아하는데 다른 건 작품으로 만들기 힘드니 나무를 택했죠.” 나무를 주제로 작업해온 그는 곧 숯에 관심이 갔다. 조각가의 관점에서 숯은 가열을 통해서 본래의 물성이 크게 변화한 재료다. “나무가 다 타고 탄성만 남은 숯을 저는 자연의 끝으로 봤습니다.” 그리고 숯을 매다는 나일론 줄은 소재 특유의 성질로 빛을 투과하고 반사하는 재미있는 존재다. 나일론 줄에 매달린 숯은 곧 자연적이고 전통적인 소재와 현대적인 소재의 만남이다.
‘An aggregate’ 연작에서 비교적 초기작은 갤러리 벽에 그린 먹색의 점과 갤러리 벽과 일정 거리를 둔 위치에 매단 숯 조각이 이어진 하나의 형태로 보이도록 의도한 작품이었다. 이를테면 반원은 먹색의 점으로, 그리고 반원은 숯으로 매달아 정면에서 완벽한 원처럼 표현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벽에서 완전히 독립된 ‘An aggregate’ 시리즈는 점차 거대한 작업으로 진화했다. 원이거나 직사각형 모습으로 구현된 작업은 조각의 배치를 조정해 형태의 일부가 깨지는 것처럼 표현하기도 하며, 계단의 모습을 하거나, 공간을 채운 나선형의 큰 물결을 만들기도 한다. “한 덩어리가 아니라 여러 요소가 모여 있는 것이 특징이죠.” 그 건축적 조합은 작품이 존재하는 공간을 타고 넘는 것도 모자라, 새로운 공간을 창조한다. 숯 조각은 하나의 건축 구조물로 구현되었지만, 동시에 움직임이 잠시 정지되었거나, 파편화된 생명체 같기도 하다. 존재를 이야기하는 동시에 사라짐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다시 말하면 이는 영원함과도 연결된 것이다.
4년 연속 작업해온 신라호텔 로비
오너먼트
국내에서 가장 큰 서울신라호텔 로비를 장식한 작품도 바로 ‘An aggregate’시리즈의 연장선에 있다. 2006년 박선기 작가의 고유한 작품 세계와 미적 조형성을 알아본 신라호텔 측에서 매년 크리스마스트리 대신 새로운 개념의 오너먼트로 공간 장식을 제안한 것이다. “공간이 매우 넓어서 여러 요소가 함께 모여 있는 집합적 형태의 작품이 어울릴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은빛과 붉은 빛깔의 플라스틱 조각을 쓴 첫해를 제외하고는 투명 아크릴을 주재료로 사용했다. 검은 숯과 전혀 다른 분위기를 내는 투명 아크릴은 빛을 투과하고 아름답게 산란시킨다. 2007년에는 원기둥이나 직육면체 등 다양한 모양과 볼륨감을 주어 공간을 구성했고, 지난해에는 긴 나일론 줄로 공중에 떠 있는 반구 모양으로 설계하고 투명색과 노란 빛깔을 함께 사용해 경쾌하면서도 우아한 분위기를 냈다. 올해 11월 말, 또 새로운 작품이 호텔 로비에 설치 됐다. 기다란 직육면체 7점의 오브제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직육면체는 가장 단순하고 절제된 형태”라고 설명한 그는 기둥의 높이에 변화를 주어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직육면체 형태에 리듬감을 살렸고, 나일론 줄에 매달린 아크릴 조각의 간격을 조정해 바닥으로 쏟아지는 둣한 느낌으로 드라마틱한 감성을 부여했다.
로비 공간을 이렇듯 한 작가에게 4년째 내어준다는 사실은 이곳을 방문하는 이용객에게 그의 작품이 큰 호응을 얻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세계, 삼성물산, 현대카드 등 국내 주요 기업의 사옥에서도 그의 작품과 조우할 수 있다는 점도 그렇다. 해외에서 먼저 이름이 알려진 그는 국내에서도 이미 2006년 조각 분야의 권위 있는 상으로 꼽히는 김종영 조각상을 수상하며 고유한 작품 세계를 인정받았다. 국내외 미술관과 갤러리의 끊임없는 초청을 받으며, 해외 옥션에서도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는 그는 평단과 컬렉터, 감상자를 즐겁게 할 줄 아는 행복한 작가다.
깊이감을 추구하다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출퇴근을 하듯 매일 규직적으로 작업하지만 “자는 시간만 빼고 항상 작품을 생각하는 셈”이라고 한다. 동시에 “생각만으로는 작가가 어떤 경지에 오를 수 없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제작한 작품이 드로잉에서 거대한 설치 작품까지 헤아리면 3천여 점. 부지런한 다작의 작가다. ‘An aggregate’ 시리즈의 경우 아이디어를 드로잉하고, 캐드 프로그램을 통해 3D 시뮬레이션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나일론 실에 숯을 꿰는 본격적인 제작 과정에 들어가니, 그 노동력이 만만치 않다. MDF로 제작된 ‘Point of View’시리즈는 나무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수없이 표면을 다듬어야 한다. 시간의 공력과 노동의 신성함이 그의 작품에는 고스란히 깃들어 있다. “예술성을 지닌 작품이 되려면, 개념이든 정신이든 뚜렷한 무언가가 보여야 합니다. 저는 깊이감을 추구합니다. 이우환 선생님의 작품처럼 완숙한 경지에 오르길 꿈꾸죠. 작품 속에서 깊이감을 어떻게 끌어갈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평면과 입체의 시각을 가지고 놀던 ‘Point of View’ 시리즈는 추상적인 도형으로 시점 놀이를 하는 ‘A Play of Infinity’라는 또 다른 시리즈를 낳았다. 재료의 물성과 형태에 관한 탐구를 지속해온 조각가로서 그는, 이 새로운 시리즈에서 형태에 집중하는 흰색 작품과 연필로 칠하거나 나무를 태워 물성을 강조한 검은색 작품에 이어 마무 재질을 그대로 살렸다. ‘건축적’인 조각의 조합인 ‘An aggregate’ 연작은 작품이 전시되는 공간 안에서 가장 합리적인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숯으로 보인 ‘점’의 작업 대신 ‘선’을 매달아 보는 작업을 구상 중이라는 귀띔도 해주었다. 새해에는 파리와 밀라노에서 열 전시를 준비 중이다. 물론 그 어느 때라도 그가 창조한 새로운 시공간을 경험하고 싶다면 그의 작품이 설치된 로비를 찾으면 된다.